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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분류없음 2008/12/04 11:03 | posted by h. |
경향신문

“동춘 서커스단 사라지면 공연예술 한 장르가 끊겨요”

기사입력 2008-12-04 09:34 기사원문보기
ㆍ유랑인생 48년 박세환 단장

‘ 제니’는 서커스단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재산 목록 1호이자 가족이기도 했다. 잠시 동춘서커스단을 떠났다 돌아온 박세환 단장을 큰 코를 흔들며 맞아주던 것이 제니였다. 2년이 지났는데도 제니는 박 단장의 체취를 알아챘는지, 앞발을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재롱을 피워댔다. 배에 화상을 입었을 땐 박 단장이 직접 미국에서 가져온 약을 발라주고 주사도 놓아줬다. 말똥말똥 큰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1980년 어느날 난로가 실수로 꺼진 사이 영하 10도를 훨씬 밑도는 날씨를 이기지 못하고 제니가 죽었다. 그 때 사람들은 박 단장에게 “인기 배우인 코끼리가 죽었으니 서커스단은 곧 망한다”며 서커스단을 해체할 것을 권유했다.

그때 서커스단을 접었어야 했을까. 미련스럽게도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땅에 파묻었던 제니가 눈에 아른거려서 박제까지 한 그였다. 제니처럼 서커스도 그에겐 아직은 접지 못할 무엇이다.

60 년대 단원이 200여명에 이르는 전성기를 누리던 동춘서커스단은 현재 경영을 이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70년대엔 TV의 등장으로 볼거리가 늘어났고 80년대엔 건설 붐과 함께 야간업소 공연장이 생겨났다. 그래도 박 단장은 서커스를 계속 해왔다. “내가 손을 놓아버리면 연극, 쇼, 뮤지컬, 곡예, 국악 등이 어우러진 우리나라 공연예술의 한 장르가 없어져요. 우리네 할머니가 리어카 타고 보러 오던, 함께 박수를 치면서 울고 웃으며 봤던 그 서커스가 없어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그 의 진단에 따르면 ‘서커스의 위기’는 변화의 물결을 잘 타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박 단장은 “서커스단은 해체되면 끝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단원 한 명이라도 더 월급 주기 위해서 마케팅이나 홍보·기획에 무심했지만 지금은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며 “내년부터는 조금 어렵더라도 전문 마케팅 기획자를 스카우트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태양의 서커스를 비롯해 요즘 공연의 대부분은 수많은 기업들이 몇 십억원씩 후원해서 이뤄진다”며 “서커스도 지금처럼 어떤 개인의 사업으로 이뤄질 수 없고 국가의 지원 또는 기업의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 전히 유랑 공연을 하는 동춘서커스단에 겨울은 최악의 시즌이다. 날씨가 추워져 천막 공연이 쉽지 않고 관객도 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 공연이 없는 동춘서커스단은 지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복권위원회 등의 후원을 받아 문화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전국의 여러 곳을 돌며 무료 공연을 펼치고 있다. 실내 공연이라 공중곡예 묘기나 동물쇼는 보여줄 수 없지만 서커스단으로선 그나마 다행이다. 지난달 20일 인천의 한 공연장에서 박 단장을 만났다.

-요즘 서커스 공연은 어떻습니까.

“2006 년 전국 순회공연 때 반응이 좋았습니다. 서커스는 우리나라에서 관객 동원을 제일 많이 하는 공연 중의 하나예요. 예술회관에서 공연하면 남녀노소가 다 모이고, 가족이 모이잖아요. 어디가도 관객이 많아요. 서커스에서 할 수 있는 종목이 아크로바틱, 비보이, 의자탑 쌓기 등 다 합하면 30가지 정도 됩니다. 모두 연출하면 7시간 정도 걸리는데 보통 2시간 공연에 16가지만 들어갑니다.”

-서커스와 인연을 맺은 지 얼마나 되셨나요.

“ 제가 61년에 동춘서커스단에 입단했거든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였지요. 그 때는 동춘서커스가 연극, 쇼, 국악, 창, 마술 등이 모두 망라된 종합 엔터테인먼트였어요. 동춘서커스가 최고였지요. 당시 이봉조 선생을 비롯해서 서영춘 선배, 백금녀, 황해, 남철, 이주일씨 등 유명한 사람들이 많았고 시시한 사람들은 못 들어왔어요. 탤런트 장항선씨가 동기예요.”

-왜 서커스단을 찾아가셨나요.

“ 제 꿈이 배우와 가수였어요. 지방에서 노래도 제법 잘했지요. 서울에 와서 그런 것을 배우고 싶은데 학원도 제대로 없고 대학의 연극영화과도 귀했어요. 더구나 그 때는 연극하고 노래부른다고 하면 ‘쟁이’니까 잘 안하려고 했었고요. 그래서 수소문한 것이 서커스예요. 당시엔 18개 극단이 있었고 서커스가 우리나라 대중 예술의 중추적, 주도적 역할을 했어요. 극장도 없지 연극단도 없지 결국 서커스 안에서 연극하고 쇼하고 마술하고 국악을 했지요.”

-배우나 가수를 ‘쟁이’라고 할 정도로 보수적인 때였는데 서커스단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집에서 반대는 없었나요.

“ 집안에 얘기도 못했죠. 제 집이 경주예요. 박혁거세 왕릉을 우리집에서 관리했고 할아버지께서 밀양 박씨 종친회 부회장이었어요. 성균관대학교 이사에 대구대학교 이사, 그리고 2대 국회의원도 하셨죠. 그런 가문에 제가 종손이에요. 큰집의 큰아들이죠. 고등학교 다닐 때 트럼펫도 좀 불고 음악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러면서 가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수소문한 것이 동춘서커스단이었어요. 집에는 말도 못했죠.”

-처음 서커스단에 들어가서는 무슨 일을 했나요.

“단원으로 들어가면 심부름부터 시작합니다. 한 2개월 동안 심부름을 하니까 공연이 끝나고 손님이 20~30명밖에 없을 때 무대에서 노래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라고 시작하는 ‘청춘의 꿈’이라는 노래를 했는데 무대 밑에서 혼자 연습할 때는 잘했는데 막상 유료 관객을 두고 조명을 받으니까 손발이 덜덜덜 떨리는 것이 악사의 음악 전주도 안들리더라고요. 노래가 폴카인데 완전히 트로트가 되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기억이 있어요.”

-그렇게 서커스단 생활이 시작됐군요.

“ 그렇죠. 남철씨가 많이 도와줬어요. 저한테 진행을 배우라고 하더라고요. 요즘으로 치면 MC처럼 사회자가 멘트를 잘하고 잘 웃기는 것은 두번째이고 당시엔 귀공자 스타일이 인기였어요. 제 자랑같지만 20세 안팎일 때는 저도 미남이었습니다, 허허허. 특히 저는 경상도 사람이라 발음을 연습하느라고 책을 엄청나게 밤을 새워가면서 읽었어요. 지방공연에서는 라디오도 없어서 동네 라디오 있는 곳으로 뛰어가서 12시에 송해 아저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받아 적고, 적어 놓은 글 위에 밑줄을 그어가면서 혼자 우물우물 읽고 연습했어요. 그러던 중 유명한 전속 사회자가 다른 곳으로 스카우트 되는 바람에 입단 2년 만에 무대에 올랐죠. 또 당시 서커스에서는 30~40분짜리 신파 연극을 했는데 <불효자는 웁니다>의 원작인 <어머니 울지마세요>라는 연극에서 주연 배우를 하게 됐어요. 프롬프터가 돌아가면 뒤에서 촛불 켜고 ‘아, 어머니. 길을 막아놓고 물어보세요.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있습니까’라는 대사를 읊었던 기억이 납니다. 3년 만에 핵심 멤버가 됐지요. 그때는 다른 사람들이 놀러 다닐 때에도 열심히 했어요. 밤잠 안 자면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망한 배우 후보생이라고 했었어요.”

-그 이후 서커스가 전체적으로 하향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60 년대까지는 좋았지요. 일반 쇼도 있었지만 도시 몇 군데 돌고 가면 쇼 자체가 끝나버리니까 결국 서커스단으로 돌아와야 했죠. 서커스가 대중예술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어요. 저도 62년인가 63년에 MBC에 가서 오디션 봤어요. 그런데 당시엔 TV가 상당히 안 좋았어요. 신성일씨 등 주연급 배우 아니면 C클래스로 낙인찍혀 단역만 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안 가고 서커스단에 남았습니다. 여기서 공부하고 후라이보이 2세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70년대 TV가 생기면서 다 나갔어요. 70년대 새마을운동 하잖아요. 낮에 새마을 사업하고 나서는, 밤에 서커스보러 와야 하는데 TV를 보는 거예요. 당시 74년 2월인가 3월에 KBS 드라마 <여로>가 워낙 인기가 있었어요. 우리 서커스 단원들도 <여로>를 보러 가버릴 정도였죠. 80~90년대에는 건설 붐이 일면서 빠졌고 야간업소로도 많이 나갔죠. 그런데 주연급 배우가 나가면 서커스단 자체가 문을 닫아야 하니까 저는 끝까지 남아 있었죠. 결국 동춘에 남게 된 것이죠.”

“곡예사 키우느라 마케팅 못한게 恨…이젠 해봐야죠”

-입단 이후 계속 동춘에 계시다가 인수까지 하게 된 건가요.

박 세환 단장은 “그동안 서커스 기획이나 마케팅이 약했다”는 점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서커스는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 혼자 기획, 마케팅에 곡예까지 하려다보니 한계가 오더라”면서 “앞으로 기획전문가 영입 등에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 | 김세구 선임기자

“저도 도저히 안되겠어서 동춘을 나왔어요. 부산에서 조그만 사업을 했죠. 무대에서 연극을 하고 사회일 보던 사람이 나가서 사업도 잘 하더라고요. 말도 잘하고 사람들 잘 대하고 하니까요. 돈을 좀 벌었죠. 그런데 75년인가 76년에 동춘이 인천 간석동에서 태풍을 만나 쓰러진 이후 서커스단을 판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내가 4~5년 몸담았고 국악을 하려고 해도, 연극을 하려고 해도, 쇼를 하려고 해도 거쳐가야 했던 동춘이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거 하나는 우리나라에 꼭 남아야 한다는 생각이요. 그래서 인수를 했어요. 당시 30평 아파트 3채 값을 줬는데 그게 서커스단 가격의 3분의 1 정도였고 나머지는 벌어서 갚기로 했죠. 대신 ‘동춘’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기로 했어요. 난 동춘은 된다고 봤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범 국민적 서커스단이었으니까 ‘쉽게 망하겠나’ 싶었죠. 그런데 가보니까 아주 난리더라고요. 단원의 3분의 1은 나갔고 동물은 동물대로 다 팔려나갔고. 2년 만에 돌아온 저를 반겨주는 것은 코끼리 ‘제니’뿐이었어요. 지나가는데 뒤에서 막 우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돌아서서 제니의 코를 안고 한참을 있었어요.”

-제니는 지금도 살아있나요.

“ 지금 동물은 원숭이와 강아지 정도예요. 제니는 서커스단을 인수하고 5~6년 뒤인 80년도에 죽었어요. 동사했지요. 죽은 제니를 묻었는데 도저히 생각이 나서 안되겠어요. 그래서 다시 꺼내서 박제를 했지요. 한국에는 대형 동물을 박제하는 곳이 없어서 일본에서 박제하는 분들을 모셔다 했어요. 컨테이너에 넣어서 공연하러 움직일 때마다 함께 다녔어요. 우리의 마스코트였잖아요. 항상 제니를 보면 마음이 편해져요. 코끼리가 제일 잘하는 인기 배우였는데 죽고 나니까 사람들은 서커스가 망한다고들 했죠. 지금 우리 형편에는 코끼리 못사요. 경영이 어려우니까요.”

-경영 상태는 어느 정도입니까.

“지금 단원은 스태프, 시설 담당, 영업·홍보 등 포함해서 70명이에요. 공연팀은 40명 정도인데 중국인이 15~16명입니다. 서커스에서 하던 연극은 TV 드라마에 빼앗기고, 쇼도 TV나 뮤지컬 등이 워낙 화려하니까 우리가 따라갈 수 없어요. 그래서 서커스에서는 예, 마술, 동물 묘기 이렇게 딱 3가지로 전문화해 버렸습니다. 지금은 공연을 하면 적자이지요. 전국 순회 공연을 하면 관객이 안와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고 워낙 입장료가 낮아요. 제가 아직까지 입장료를 1만원 이상 받아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일단 손님들이 너무나 고맙잖아요. 보러 와주는 것만으로도요. 비싸게 받으면 오지 않을까 겁도 나고요. 서커스는 사실 남녀노소가 모두 좋아해요. 그런데 우리는 시설이 너무 열악합니다. 천막을 치더라도 계단식 의자에 조명도 빵빵하고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게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못하죠. 게다가 우리나라는 더욱 공연하기가 힘든 나라예요. 국토가 좁고 인구가 많지요. 농번기엔 바쁘고 여름에 텐트 안이 매우 덥습니다. 비도 많이 오고요. 가을이 좋은데 반짝 했다가 겨울 추위가 금방 찾아오죠. 우리 서커스단도 4~5월은 흑자인데 가장 어려운 것은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넉달 동안 손해가 많다는 거예요. 경험에 의해서 다 압니다. 연료비는 얼마이고, 난방비는 얼마라 서커스단을 굴리면 굴릴수록 적자라는 것을요. 마지못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든데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 일단 단원들이 헤어지면 다시 모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다른 이유는 서커스 단원 한 명을 키워내는데 오랜 시간이 투자되기 때문입니다. 엑스트라 한 사람을 가르치는데 3년이 걸리는데 놀면 살이 찌고 둔해집니다. 지금은 후계자가 없어서 젊은 애들은 외국에서 많이 옵니다. 중국 사람들은 보통 2~3년씩 가르치니까 같은 단원이라고 볼 수 있지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손을 놓아버리면 우리나라 공연예술 한 장르가 없어진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동춘서커스단’이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연극, 쇼, 뮤지컬, 곡예, 국악 등이 어우러진 하나의 장르가 없어진다는 것이죠.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전 세계가 서커스가 다시 발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자꾸 위험하게 문닫기 직전을 왔다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나라만 그렇습니까.

“ 서커스단은 100% 월급으로 단원을 운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운영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전 세계적으로 서커스 강국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서커스를 지원합니다. 캐나다는 84년에 우리나라 돈으로 150억원을 일시에 지원했어요. 작품을 만들어 세계를 돌며 공연하는데 연 매출이 8000억~9000억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서커스단 구성도 캐나다 사람은 15% 정도이고 나머지는 중국, 독일, 러시아, 필리핀 등에서 온 외국사람이라고 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우리 서커스를 무시하는 것 같아요. 아직도 옛날에 읍소재지 시장바닥 옆에서 천막 펄럭이며 하던 공연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죠. 서커스가 다른 나라들보다 뒤처졌다고 해도 과거보다는 많이 발전했거든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관객들의 입장에선 우리 서커스가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처럼 화려하거나 멋있지 않고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무슨 말인지 압니다. 저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요. 태양의 서커스를 저도 가서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 서커스가 관객들의 시각적인 욕구를 잘 반영하지 못하고 시설도 못따라가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곡예 자체만 놓고 보면 우리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뮤지컬이나 연극, 쇼 수준도 우리나라가 세계적이잖아요. 그렇다면 제가 가진 서커스 노하우와 뮤지컬과 연극 감독의 노하우를 섞어서 연출하면 세계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결국 제가 비즈니스가 약해서 그런 연결고리들을 만들어내지 못했어요. 기획이나 마케팅이 약했지요. 왜냐하면 마케팅이나 기획을 하는데 투자할 돈을 가지고 곡예사 2~3명 더 키우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서커스단은 일단 헤어지면 끝이거든요. 그렇다보니 마케팅도 제가 하고, 기획도 제가 하고, 홍보전단지까지도 제가 만들었지요. 그러니까 한계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내년부터는 좀 어려워도 마케팅이나 기획 전문가를 스카우트 하려고 합니다. 대학로에 좀 자주 나가볼 생각이에요. 과거에도 시도는 있었어요. 국립극단 예술 감독이던 이윤택씨가 연출한 서커스 악극 <곡예사의 첫사랑>에 우리 단원들이 참가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계속 결합을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결국 남는 문제는 자본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위에 언급한 대로 작품을 기획하고 투자한다면 분명히 한달 뒤에는 부도나서 도망자가 돼 있을 겁니다. 결국 어떤 개인의 힘만으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일반 연극이나 뮤지컬도 100% 공연만으로 흑자나는 데는 없어요. 만약 제작비가 10억원이면 5억원 정도는 매출이라고 하더라도 나머지는 기업 등 스폰서와 정부 지원 등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겁니다. 지난번에 국내에서 공연한 캐나다의 한 서커스도 은행, 방송사, 대기업 등으로부터 140억원에 가까운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압니다. 작품을 만들려면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드는데 그렇게 일시적으로 투자할 돈이 없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비극입니다.”

-상설 서커스장도 짓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천에 1500석 규모로 짓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운영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원래는 2004년에 착공해서 2005년에 개관할 예정이었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어서 미뤄진 것입니다. 이 극장은 관광객 위주로 운영하고 싶습니다. 비언어극이니까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죠. 공연을 짜서 5개월마다 다른 프로그램으로 바꿔서 운영하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이 계획도 결국 투자자 유치가 관건이 되겠지요.”

-‘힘들다’고 하시면서도 말씀에서는 서커스에 대한 강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계속 서커스단을 꾸려 나가실 겁니까.

“ 예전에 시골에 가면 아들이 리어카에 어머니를 태워 서커스에 모시고 왔어요. 시대가 좀 발전하니까 경운기 타고 오시고. 요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자들 손잡고 오십니다. ‘가마니 깔고 앉았었는데 요즘은 의자도 있구나’하면서 추억에 젖기도 하시고 아이들에게 예전 이야기도 들려주시더라고요. 아들·손자 손잡고 물병 들고 빙 둘러앉아서 박수치고 웃고 울면서 함께할 수 있던 예술이 서커스입니다. 동춘서커스도 보시고 태양의 서커스도 봤다는 한 네티즌이 ‘동춘서커스만큼 감동적인 것이 없었다’고 남긴 글도 봤습니다. ‘동춘 파이팅’이라고요. 관객들과 곡예사가 감정을 공유하는 이렇게 좋은 대중예술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건 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한 마케팅 책은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와 동춘 서커스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썼다. 동춘서커스단 프로그램 하나하나의 기술은 훌륭하지만 천막을 나와 실생활로 돌아갔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부족하다고. 서커스라는 ‘종합예술’을 통합하는 시나리오와 스토리가 없다고. 이제 국악과 신파 연극이 사라지고 곡예 하나로 서커스를 이끌어가는 것은 힘든 세상이 됐다. 동춘서커스단이 과거에 이야기를 풀어내는 장(場)이 됐듯이 앞으로도 꾸준히 우리들의 이야깃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일까. 겨울엔 찬 바람이 불어 공연이 멈춰도 따뜻한 봄이 되면 살랑 바람 타고 다시 천막을 쳤던 동춘의 역사가 계속될 수 있을까.

동춘 서커스단은

동춘서커스단은 일본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하던 고 동춘(東春) 박동수씨가 1925년 우리나라 사람들 30여명을 모아 만들었다. 첫 무대는 그로부터 2년 뒤 목포시 호남동에서 올렸다. 이후 60~70년대 동춘은 최대 호황을 누린다. 별다른 여가가 없던 시절 동춘은 서민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소속 단원들만 250명이 넘었고 영화배우 허장강, 코미디언 서영춘, 배삼룡, 백금녀, 남철, 남성남씨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이 동춘을 거쳐갔다.

하지만 동춘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내리막을 탄다. TV가 나오고 건설붐과 함께 야간업소가 생기면서 동춘서커스단은 더이상 ‘유일한’ 볼거리가 아니었다.

뿔 뿔이 흩어질 위기에 처한 동춘서커스단을 지금의 박세환 단장이 75년 인수한다. 올해로 동춘과 맺은 인연이 48년째다. 2년 주기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공연을 하고 있고, 내년이면 경기도 부천에 1500석 규모의 상설서커스장이 완성될 예정이다.

<인천 | 이지선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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